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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柳成龍

 
  • 자 而見(이현), 호 西厓(서애), 雲巖(운암)
  • 1542(중종 37) ~ 1607

역사인물 정보

서애 류성룡은 1542(중종37) 10월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입암 류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의 둘째 아들로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본가는 안동부 풍산현 하회리이다. 본관은 豊山(풍산)이고 자는 而見(이현), 호는 西厓(서애), 雲巖(운암)이며,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렸다.

16세(1558년, 명종12)에 향시에 처음으로 합격하고 관료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어려서 총명과 예지가 남달리 뛰어났고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는데, 21세가 되던해 9월에는 도산서원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近思錄(근사록)”을 전수받으며 사사하였고, 金誠一(김성일), 趙穆 (조목) 등과 교우관계를 맺음으로서 후일에는 퇴계를 종주로 하는 영남학파의 정맥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학맥의 관계에서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성리에 관한 학문에 전념했고 실천적인 것을 탐구하여 성현을 지표로 삼았던 서애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와 사상을 지니게 된다.

퇴계는 서애를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 사람은 하늘이 낳은 인물로 장차 반드시 나라에 크게 쓰일 것이다.’ 라고 찬탄하였다고 하고, 또 퇴계 선생이 남에게 ‘서애는 빠른 수레가 길을 나선 듯하니 그 사람 형제의 취향이 가상하다.’ 라고 평했다는 기록을 보면, 퇴계 문하로서 학업과 재능에 있어서 보여준 남다른 면모가 퇴계로부터 일찍부터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5세(1576년, 선조9)에는 고향에 내려와 遠志精舍(원지정사)를 세웠는데, 이 원지정사는 서애가 1573년 부친상을 당하여 집상한 후에 조정의 부름을 고사하고 은거할 때인 1576년에 완성한 처소이다.

서애는 원지정사를 짓고 1578년에 ‘記(기)’를 지었는데 “淵明(연명)의 시에 ‘마음이 세속과 머니 사는 곳이 절로 한가롭다’ 하였으니,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함께 돌아왔겠는가 이로써 기를 짓는다.” 라는 구절에서 보면 젊은 시절부터 隱逸(은일)하여 소원하던 학업에 힘쓰고자 했던 處士的(처사적)인 기질도 함께 지닌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38세에는 부제학으로 승임하였는데, 이 동안에 서애는 經筵(경연) 講官(강관) 가운데서 최고라는 평을 들었고, 곧 동부승지로 옮겨 더욱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湖堂(호당: 독서당)에서 賜暇讀書(사가독서)의 영예도 누렸다.

43세에는 禮曹判書(예조판서)로 知經筵(지경연). 春秋館事(춘추관사)를 겸직하기에 이르자, 이와 같이 파격적인 승진에 대해서 그 자신은 진심으로 이를 부당하다고 하고 여러 번 사퇴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옛날에 임금은 신하를 대하면서 신하로 대우한 경우를 있었고 벗으로 대우한 경우도 있었고 스승으로 대우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의리가 후세에 전해오진 않지만 경은 10년 동안 經幄(경악)에 있으면서 완전한 덕을 갖추어 하자가 전혀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의 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정분은 친구와 같다.’고 하면서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관인으로서 지닌 뛰어난 역량과 학덕을 선조가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직생활에서도 서애는 늘 처사이고자 했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45세가 되던 해 촌락과 더욱 멀리 떨어져 그윽한 멋을 느낄 수 있는 玉淵書堂(옥연서당)을 짓는다. 이 때 서애는 창원부사로서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함경남도 甲山(갑산)으로 유배되었던 친구 許?(허봉: 허균의 형))을 위해 영의정 朴淳(박순)에게 ‘죄에 비하여 무거운 벌을 받고 있다’고 했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직접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풀려나도록 돕기도 하기도 했다.

48세에는 鄭汝立(정여립)의 역모로 己丑獄死(기축옥사)가 일어나 스스로 물러나 귀향하고, 정사에 머무르면서 시문활동을 했다. 다음해에는 문학적으로 교유했던 허봉이 1574년에 명나라에 가서 그곳의 문물을 보고 지은 <許荷谷朝天記: 허하곡조천기>의 序(서)를 쓰기도 하였고, 친구 허봉의 아우인 筠(균)이 찾아와 누이 許蘭雪軒(허난설헌)의 蘭雪軒藁(난설헌고)를 가지고 왔을 때는 跋文(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잠시 복직했던 서애는 57세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서 10월에 부원군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고, 12월에는 관직을 삭탈당하는 비운을 격기도 하였다. 허균이 선조를 보좌하던 신하 중 한 사람이었던 서애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선조가 전권을 위임할 정도의 재능이 있는 儒者(유자)였지만 끝내 그 재능을 펴지 못한 것은 그의 재능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당쟁과 왜란 등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활동했던 서애가 느끼는 인간적인 고뇌 그리고 처사가 되기를 바랬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인간심리였다고 하겠다.

59세에 11월에 직첩이 還給(환급)되고 이후 여러 번 召命(소명)이 내려졌으나 평생을 마치도록 응하지 않았다. 30여 년 동안 조정에서 영상 등 높은 벼슬자리에 줄곧 있던 그였지만 일단 환로에서 물러난 뒤에는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거했다.

63세에는 扈聖功臣(호성공신)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지만 상소하여 致仕(치사)하기를 빌었으며 벼슬살이로 성현공부에 힘쓰려던 初志(초지)를 빼앗겼음을 한탄하면서, 세 가지 恨(한)인 ‘성군과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 것이 첫째 한이요, 벼슬이 크게 분수에 넘쳤지만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요, 망령되이 학문하려는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다’을 말하기도 하였다.

서애는 벼슬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원지정사와 옥연서당 등 조용한 藏修處(장수처)에서 연구하고 덕을 쌓는데 정진하였고, 때로는 낙동강 岸(안: 언덕)의 絶崖(절애)에서 소요하면서 晩年(만년)을 조용한 전원에서 연구 집필에 몰두 하였다.

이 때 퇴계 연보를 찬술하였으며 왜란에 대한 반성과 정리인 “懲毖錄(징비록)”과 “軍門謄錄(군문등록)” “愼終錄(신종록)” “永慕錄(영모록)” “觀化錄(관화록)” 등 많은 논저를 지었다. 하지만 병이 더해지면서 1607년 5월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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