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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金誠一

 
  • 학봉(鶴峯)
  • 1538 ~ 1593

역사인물 정보

김성일(1538~1593)은 석(錫)의 16세 손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석의 15세손 청계(靑溪) 진(璡)을 아버지로, 여흥(驪興) 민제(閔霽)의 현손 세경(世卿)의 따님을 어머니로 태어났으니 오형제중 넷째이다.

학봉은 6세에 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제물지지(濟物之志)가 있어 갈 곳 없는 거지를 보면 반드시 쌀을 얻어 주기도 했다. 한번은 여러 아이들과 높은 바위 위에서 노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땅으로 떨어졌다. 다른 아이들은 놀라 흩어지는데 학봉만이 어른들께 알려서 살려 주었다. 8세 때 이미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땐 결코 구차하게 굴지 않아서 부친이 이 아이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것 이라고 까지 했다. 9세 때 어머니상을 당했고 10세에는 뜻을 세워 힘껏 공부하였는데, 윗사람이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할 때는 굵은 것을 가져 왔다. 누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회초리가 굵지 않으면 아프지 않고 안 아프면 징계가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17세 때는 큰형인 약봉(藥峯) 극일(克一)을 따라 그의 임소에 갔다. 18세 겨울 12월 안동 권덕봉(權德鳳)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19세에는 퇴계(退溪)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에 학가산(鶴駕山) 광흥사(廣興寺)에서 독서했다.

21세 때는 도산서당(陶山書堂)에서 동생인 남악(南嶽) 복일(復一)과 서전(書傳)을 읽고 가을에는 역학계몽을, 겨울에는 셋째형 운암(雲岩) 명일(明一)과 함께 퇴계에게 심경과 대학의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다. 24세 11월에는 퇴계의 회갑일이 들어 도산으로 찾아뵙고 그대로 머물러 수업하면서 대학(大學) 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을 읽었으며 25세 가을엔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었다. 27세 7월 진사 회시에 2등에 올랐고 28세 2월에는 대학을 읽었으며 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관학생들과 함께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죽이기를 요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영남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대궐에 들어가서 상소하려 함에 퇴계에게 여부를 물었다. 퇴계는 ‘복수’를 명분으로 삼아 상소한다면 그 죄에 온당치 못하고 집단시위를 시도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

30세 때 명종임금이 붕어하시고 31세 6월에 문과에 급제, 가을에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 되었으며 32세 봄에 정자(正字)로 승진, 3월 동호(東湖)에서 퇴계를 전송하고 가을엔 청량산을 노닐고 10월엔 퇴계에게 편지로 입신행기지방(立身行己之方)을 물었다.
33세 3월 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고 12월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위패를 봉안하고 통곡 했다. 35세 때에 봉교(奉敎)에 오르고 상소하여 노산군(단종)의 묘를 확장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복원하라고 했으며 군덕시폐(君德時弊)에도 언급했다.

36세에 성균관전적 형조, 병조, 사간원, 홍문관 등의 관직을 거치며 11월에 비현각(丕顯閣)에서 입시야대(入侍夜對)하였다. 38세엔 체직되어서 귀향하였다. 39세 여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7월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12월에 퇴계 이황의 시호를 왕명을 받아 시행했다.

40세 정월 개종계주청서장관(改宗系奏請書狀官)으로 차출되어 중국에 갔다가 7월초 복명했으며 42세 9월에는 함경도순찰어사로 차출 되었다. 이 때 군기(軍器), 목장(牧場), 창곡(倉穀), 의유(衣?) 등을 꼼꼼히 살폈으며, 윤달에 아버지 상을 당했으며 44세 때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45세 7월에는 금계리로 이거했다. 46세 3월 황해도순찰어사로 차출 되었고 7월에 나주목사에 임명 되었으며 47세 봄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만들고 한훤당, 일두, 정암, 회재, 퇴계 다섯 분을 모시고는 백록동규(白鹿洞規)에 따랐다.

48세에는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 계산잡영(溪山雜詠) 등을 간행했으며 49세 7월엔 복천(福川)의 적벽(赤壁)을 노닐고, 12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을에 주자서절요 퇴계선생 자성록(自省錄)을 간행했다.

50세 2월 주왕산을 답사하고, 대정(臺亭)을 축성했으며 4월엔 퇴계선생문집을 편찬했다. 겨울엔 봉선잡의(奉先雜儀), 길흉제규(吉凶諸規)를 지었으며 51세 6월 병산에서 퇴계선생문집을 교정 7월에 조정에 들어가서 겨울에 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에 임명되었다.

52세(1589) 12월엔 일본통신부사로 차출 되었으며 5월 초4일 대마도에 도착 6월 16일에는 정사 황윤길(黃允吉) 과 서해도왜서중(西海道倭書中)의 ''래조(來朝)'' 두자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투었다. 7월 22일 일본국 수도에 들어갔다. 8월 2일에는 서장관 허성과 관백(關伯) 토요토미히데요시와 만나는 절차를 논의 했다.

9월에는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일책(一冊)을 지어서 왜승(倭僧) 종진(宗陳)이 보여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속의 잘못된 아국풍속(我國風俗:조선의 풍속)을 바로잡아 관백(토요토미히데요시)에게 보여줬다. 10월에는 허 서장관(허성)과 관광하는 것이 잘못 되었음을 논했고 객난설답상사(客難說答上使)를 지었으며 11월 7일 비로소 왕명을 전한 뒤 입도출도변(入都出都辯)과 왜인예단지(倭人禮單志)를 지었으며 25일에는 일본 서계(書契)가 왔는데 그 사의(辭意:말이나 글의 뜻)가 매우 예절에 어긋나서 현소(玄蘇), 상사(上使), 평행장(平行長) 등에게 서신을 주고받기도 했다.

52세 2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3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고 7월에는 조정에 들어가서 최영경(崔永慶)과 비통한 마음으로 극론하였다. 겨울엔 상차(上箚:간단하게 글을 써서 상소)해서 군덕시사(君德時事)를 논했으며 섣달에 선유정(仙遊亭) 북쪽에 옥병서재(玉屛書齋)를 짓고 은둔하며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55세 임진(1592) 4월 11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왜군이 부산 동래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명(掌命)이 내렸으나 도중에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어 영남으로 돌아왔다. 5월에는 조종도(趙宗道) 이노(李魯)가 찾아와서 만났다.
초유문(招諭文)을 초(草)해서 도내에 포고했으며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에게 서신을 보냈다. 곽재우와 김수(金?)사이를 화해시키고 또 곽재우를 신구(伸救)하는 계를 올렸다. 56세 2월에는 이노를 보내서 첨병을 막게 하는 등 임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최선을 다했다. 4월 19일 발병해서 29일 진주공관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후(死後) 갑오년(1594) 대신들이 추증(追贈)을 요청했으며 을미년(1595) 2월에 부제학 김우옹(金宇?)이 상차(上箚)하여 추증을 요청했고 을사년에(1605)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이 추증되었다. 광해 원년 기유년(1609)에 광해군이 이천추(李天樞)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인조 27년 기축년(1649)에 문집이 출판 되었으며 숙종 원년 을묘년(1765)에 사림이 시호를 내릴 것을 상소하였다. 숙종5년 기미년(1679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출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김성규 객원기자 | 안동넷